미국 측, 한국 엄격 규제 '디지털 장벽' 지목
[HBN뉴스 = 홍세기 기자] 구글의 고정밀 한국 지도 국외 반출 보완서류 제출 마감 시한을 앞두고, 정부와 산업계·학계가 정면으로 엇갈리며 논쟁이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5일 관련 업계와 정부 등에 따르면 국내 학계는 “지도 반출 시 향후 10년간 최대 197조원의 경제적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으며 사실상 ‘불허’를 압박한다. 반면, 미국 측은 한국의 엄격한 규제를 ‘디지털 장벽’으로 지목해 통상 마찰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정부는 군사·보안시설 가림 처리, 좌표 표시 제한, 국내 데이터센터 설치 등 이른바 ‘3대 조건’을 제시한 상태다. 이 조건을 구글·애플이 얼마나 수용하느냐에 따라 최종 결정 방향이 갈릴 것이라는 관측 속에, 허용과 불허 어느 쪽도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딜레마’가 심화되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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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포그래픽=나노바나나 생성] |
◆ 구글·애플 세 번째 도전...정부는 ‘유보’와 ‘연장’ 반복
고정밀 지도는 축척 1:5000(지도상 1cm가 실제 거리 50m)에 도로·건물·지형이 정밀하게 표현된 국가기본도다. 자율주행, 도심항공교통(UAM), 스마트시티, 디지털트윈, 드론·로봇 산업 등 다양한 첨단 서비스의 기반 데이터로 활용되면서 전략적 가치가 커지고 있다.
구글은 2025년 2월 국토교통부에 1:5000 축척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해외 데이터센터로 반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2011년(비공식 요청), 2016년에 이어 세 번째 시도다. 앞선 두 차례는 모두 안보 우려를 이유로 불허됐다. 애플도 같은 해 6월 동일한 축척의 지도 반출을 신청했으며, 2023년 2월 첫 신청이 불허된 뒤 재도전에 나선 상태다.
국토부는 국방부·외교부·국정원 등 관계 부처가 참여하는 ‘국외반출 협의체’를 통해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정부는 당초 2025년 5월과 8월 결정을 내리려 했지만 국가안보와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추가 검토를 이유로 두 차례 처리 기한을 연장했다. 2025년 11월에는 아예 구글에 2026년 2월 5일까지 보완 신청서 제출을 요구하면서 그때까지 심의를 보류하기로 했다.
애플 역시 신청서 보완을 요청해 심사 기간이 내년으로 넘어갔다. 애플은 영상 보안 처리, 좌표 표시 제한, 국내 서버(데이터센터) 설치 등 사후관리 조치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다시 제출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국내에 데이터센터를 실제로 구축할지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 정부 “군사시설 가리고 좌표 제한, 국내 서버 둬야”...3대 조건이 분기점
정부는 고정밀 지도 반출을 둘러싸고 “아직 허용·불허 어느 쪽도 정해진 바 없다”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3대 핵심 조건’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3대 조건은 △위성·항공영상 속 군사·보안시설 가림 처리 △한국 좌표 정보를 국내외 모든 사용자에게 표시하지 않도록 제한 △국내 데이터센터(서버) 설치다.
구글은 지난 9월 기자간담회를 통해 군사·보안시설 가림 처리와 좌표 표시 제한은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이를 문서화한 보완 신청서는 아직 제출하지 않아 협의체가 심의를 중단한 상태다. 국내 서버 설치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도 영상 보안 처리와 좌표 제한 조건 수용 의사를 전달했지만, 한국에 데이터센터를 세우겠다는 구체적 약속은 내놓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가 국내 데이터센터 설치를 사실상 ‘마지노선’으로 삼는 것은 데이터 주권과 과세 문제, 사후 관리 가능성 때문이다. 고정밀 지도 데이터가 한국 내 서버에 저장될 경우 국내 법과 규제를 적용하기 쉽고, 글로벌 빅테크가 한국 시장에서 거둔 이익에 대해 합당한 세금을 부과할 여지도 커진다. 반대로 해외 데이터센터에만 저장될 경우, 정보주권 약화와 함께 ‘데이터는 밖에, 서비스와 수익은 플랫폼사에’라는 구조가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 “10년간 최대 197조 손실”...대한공간정보학회 포럼서 ‘경고음’
논쟁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달 초 대한공간정보학회가 내놓은 연구 결과다. 학회는 2월 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2026 산학협력 포럼’을 열고 “고정밀 지도가 국외로 이전될 경우 2026~2035년 10년간 최소 150조6800억원에서 최대 197조3800억원에 이르는 경제적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연구를 수행한 정진도 한국교원대 교수는 연평균 산업 피해, 해외 플랫폼에 대한 잠금(lock-in) 비용, 전환 비용, 보안 기대 비용, 준수·감사 비용, 로열티 등을 변수로 삼아 동태 연산가능일반균형(CGE) 모형을 적용했다. 고정밀 지도 반출로 직·간접 영향을 받는 산업으로는 공간정보, 지도, 디지털 플랫폼, 모빌리티, 건설, 관광, 물류, 유통·소매 등 8개 분야가 꼽혔다.
정 교수는 특히 “2035년 한 해만 놓고 보면 낙관적 시나리오에서도 53조원, 비관적 시나리오에서는 99조원의 비용이 발생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2~4% 손실에 해당한다”며 “국외 플랫폼 의존이 심화되면 산업 피해와 로열티 비용이 누적돼 2032년 이후에는 되돌리기 어려운 비가역적 경로에 진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조건 없는 반출 허용’은 위험하다며, 설령 반출을 허용한다 하더라도 ▲ 지도 표준·API 상호운용성 확보 ▲ 플랫폼 공정 경쟁 제도화 △R&D 강화 및 기술 표준 선점 ▲ 국내 산업 생태계 개선 ▲ 위험 관리 거버넌스 구축 등이 선행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사실상 “국내 제도·생태계 정비 없이 성급히 반출을 허용하면 장기적으로 치르는 비용이 너무 크다”는 메시지다.
◆ 2025년 국회 토론회부터 이어진 ‘산업·세수’ 논쟁
지난해 5월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내 지도 데이터의 반출이 국가 산업에 미치는 영향’ 정책 토론회에서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제기된 바 있다. 당시 연세대, 가천대 등 학계와 한국공간정보산업협회, 산업부 관계자 등이 참석해 고정밀 지도 데이터가 자율주행·UAM·스마트시티·드론·로봇·국방 등 신산업의 기반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해외 플랫폼 종속 위험과 조세 형평성 문제를 집중 거론했다.
발제자들은 국내 기업이 막대한 예산으로 구축한 국가 자산을 글로벌 빅테크가 사실상 ‘원가 이하’로 활용하면서, API 사용료와 로열티는 오히려 국내 기업이 지불하는 구조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한공간정보학회가 이번에 내놓은 ‘197조원 손실’ 추정치는 이러한 우려를 계량적으로 뒷받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 반대편 논리는 “한국만 역주행…관광·통상·편의 역차별”
반면 찬성론자들은 한국이 여전히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주요국으로 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구글의 요청을 계속 막을 경우 외국 관광객과 국내 이용자들이 글로벌 서비스에서만 불편을 겪고, 한국의 디지털 경쟁력이 뒤처진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구글과 애플은 고정밀 지도 국외 반출이 허용되면 내비게이션·길찾기, 실시간 교통정보, 자율주행 지원 등 서비스 품질이 대폭 개선돼 한국을 찾는 해외 관광객의 이동 편의가 커질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미국 정부 역시 한국의 지도·데이터 규제를 ‘디지털 장벽’으로 문제 삼으며, 한미 간 디지털 무역 관련 팩트시트에는 위치정보 등을 포함한 데이터의 국경 간 이전을 촉진하고, 미국 기업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정부가 안보와 산업 보호를 이유로 계속 불허하거나 결정을 미룰 경우, 통상 협상에서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특히 미국이 고관세·비관세 장벽을 카드로 꺼낼 경우, 지도 데이터 한 건이 ‘통상 패키지’에 묶여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 정부는 ‘조건부 허용’ 시그널...하지만 데이터센터 최대 난제
현재 기류만 놓고 보면 정부가 완전 불허보다는 ‘조건부 허용’ 쪽으로 무게를 두되, 빅테크가 국내 데이터센터 설치까지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최대 변수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정부가 누차 강조해온 ‘3대 조건’ 가운데 군사시설 가림 처리와 좌표 표시 제한은 구글·애플 모두 원론적으로 수용 의사를 밝힌 상태다. 관건은 국내 데이터센터 설치 여부인데, 이는 고정사업장 인정과 법인세 부담, 각종 규제 준수 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글로벌 IT 기업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지점이다.
일각에서는 한국에 이미 클라우드 인프라를 구축한 글로벌 사업자들을 감안할 때, 일정 수준의 국내 저장·거점 의무를 부과하는 타협안이 모색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다만 이 경우에도 저장 범위·암호화 수준·접근 통제권 등을 둘러싼 추가 협의가 불가피해, 실제 승인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 향후 전망, “올해 상반기 결정 쉽지 않다” vs “한·미 통상 압박 변수”
업계와 학계에서는 올 상반기 중 구글·애플 건에 대한 최종 결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정부가 구글에 보완 신청서 제출 마감 시한을 2월 5일로 못 박았다고는 하지만, 서류 검토와 추가 협의, 필요시 추가 보완 요청까지 감안하면 상반기 내 결론도 장담하기 어려운 탓이다.
또 다른 변수는 정부가 두 건을 ‘병합 심사’할지 여부다. 지난해 말부터 업계에서는 구글과 애플의 고정밀 지도 반출 신청을 한꺼번에 심사해, 동일한 기준과 조건을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는 관측이 제기돼 왔다. 병합 심사가 이뤄질 경우, 한쪽만 허용하거나 한쪽만 불허하는 ‘차등 결정’을 내리기는 더 어려워질 수 있다.
결국 단기적으로는 ‘결정 유보+조건 협상’ 국면이 이어질 공산이 크고, 중장기적으로는 데이터센터 의무화, 플랫폼 공정경쟁 규제, 공공 지도 데이터 개방·고도화 등 제도 패키지를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고정밀 지도 반출 문제는 개별 기업의 신청 건을 넘어, 한국의 데이터 주권·디지털 통상 전략·국내 플랫폼 산업의 향배가 교차하는 상징적 시험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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