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면 탕감, 성실하면 손해...정책의 민낯
[HBN뉴스 = 이동훈 기자] “열심히 빚 갚고, 꼬박꼬박 보험료 낸 사람만 바보가 되었다.”
최근 감사원이 지적한 새출발기금의 부적정 채무 감면 사태와, 연이어 불거진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 논란을 바라보는 여론의 냉소다. 이는 단순한 불평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공정’과 ‘원칙’이라는 신뢰 자본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험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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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연합뉴스] |
먼저 금융을 보자. 코로나 시기 자영업자의 재기를 돕겠다는 선의로 출범한 새출발기금은, 상환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에서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냈다. 소득이 수천만 원에 달하거나 고액의 가상자산을 보유한 차주들까지 빚 탕감의 혜택을 받았다. 그 사이 묵묵히 이자를 감당해 온 성실 차주들, 특히 매달 월급에서 원리금을 갚아온 유리지갑 직장인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피할 수 없었다. “버티면 탕감받는다”는 잘못된 신호가 금융 시장의 기본 규율을 잠식한 것이다.
금융의 원칙이 흔들리는 와중에, 건강보험을 둘러싼 논란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최근 탈모 치료제의 건강보험 적용 가능성이 거론되며 사회적 논쟁이 불붙었다. 탈모가 개인의 삶의 질과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건강보험의 대원칙은 분명하다. 중증·고액 질환으로 인한 가계 파탄을 막는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점이다.
현실은 어떤가. 생명과 직결된 희귀·난치 질환자들은 여전히 고가 신약의 급여 등재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한정된 재정 여건 속에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다. 이러한 맥락에서 탈모 치료제 급여화 논의가 등장하자, 재정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와 함께 의료계 내부에서도 “중증 질환 급여화가 우선”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결국 새출발기금과 탈모약 급여화 논란은 하나의 본질로 수렴된다. 당장의 민심을 의식한 정책 설계가, 장기적 원칙과 형평성을 희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빚을 갚지 않아도 탕감받고, 생명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영역까지 공적 재원을 투입하겠다는 신호는 달콤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용은 고스란히 누군가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매달 성실히 빚을 갚고, 꼬박꼬박 보험료를 내온 중도층 국민들이다.
정책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로 증명되어야 한다. 빚 탕감의 결과가 성실 상환자의 박탈감이라면, 탈모약 지원 논의의 결과가 중증 환자 지원 여력 축소로 이어진다면, 그 정책은 재검토가 불가피하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더 많은 예외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무너진 원칙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빚은 갚는 것이 기본 원칙이어야 하고, 건강보험 재정은 생명을 지키는 데 우선 사용돼야 한다. 공정은 감상적인 구호도, 선거용 선물도 아니다. 엄정한 규칙이 일관되게 적용될 때 비로소 사회의 신뢰는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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