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엔뉴스 = 편집국]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처음 보는 누군가를 어디서 본 듯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과학적으로도 해명할 수 없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영화 <파묘>의 인기와 더불어 지난 2002년 출간된 <빙의>가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당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빙의>는 한국불교법성종의 큰스님인 묘심(妙心) 종정이 K-컬처의 주역으로 ‘오컬트’를 이미 오래 전에 내다봤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다음은 묘심(妙心)종정의 지면(紙面) 설법 그 여섯 번째 ‘부처님 법에는 공짜가 없더라’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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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정사. |
북한산 자락에는 유난히 계절이 빠르게 스며든다. 지난 밤 내린 비가 빨갛게 타오르는 꽃무릇을 여기저기 또 피어나게 하고, 이름 모를 들국화는 형형색색으로 가을빛의 향연을 펼치는 이 곳.
어느새 밤아람이 벌어져 툭툭 떨어지는가 하면 언제부터 이 산을 지켜왔을까 싶은 감나무에 가지가 늘어지게 주홍빛 단감이 익어간다. 노란빛으로 물들어가는 은행나무에는 암수를 구분할 순 없지만 은행이 한웅큼씩 매달려 있다. 한들한들 코스모스에 귀뚜라미 소리, 산새들도 창공을 비상하는 드넓은 푸른 하늘 아래 병풍처럼 펼쳐진 북한산의 위엄은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한국의 마테호른’을 보는 듯하다며 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경건하게 하는 보현봉이 수려한 경관을 자아내며 절 앞마당 역할을 해주니 용맥이 흘러 용이 꿈틀대는 용루보전(龍樓寶殿)이 따로 없지 않은가 싶은 경내를 거닐다 문득 잎새와 꽃이 만날 수 없다 하여 상사화(相思花)라 불리우는 꽃무릇을 닮은 한 젊은 연인의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아함경에 이르기를 “어떤 이는 한 냥의 빚에도 묶이고, 어떤 이는 백 냥 혹은 천만 냥의 빚을 졌더라도 결코 묶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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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심 종정. |
이는 비단 경제적 금전적인 ‘빚’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속세의 잣대로 하나를 주었으니 하나를 받으면 그만 아닌가, 혹은 하나만 주었으나 이자를 받아 더 많은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이도 있고, 반대로 하나를 빌리고 하나만 성실히 갚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를 빚지고도 백을 천을 갚고자 하는 이도 분명 존재한다. 이런 형태는 기도를 하러 절에 오는 이들에게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말처럼 곤경에 빠진 이에게 호의와 친절, 게다가 금전적인 도움까지 주었는데 하나를 내어주니 백을 가져가려 하는 게 중생심(衆生心) 탐심(貪心)이고, 탐욕(貪慾)이더라. 부처님께 절하고, 복전함에 시주했으니 만 가지 소원이 이뤄지게 해 달라고 하는 어리석음을 너무 쉽게 범하고 있다.
하물며 부처님 법을 갈구하고, 매일 같이 각자가 간절히 바라는 바를 이루고자 수천, 수만의 경전 중 으뜸 되는 경을 찾아 독송(讀誦)하고, 또 발복(發福)을 비는 중생들 중에 우매하고, 무지하여 부처님 전에 감히 행할 수도 없는 약속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내가 이만큼 기도 했으니 가시적으로 보이는 결과물 내놓으라 억지를 부리는 이도 있더라.
그런데 이 나이 되어 되짚어 보면 부처님 법에는 결코 공짜가 없더라. 그리고 기도의 공덕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 든 받게 되더라.
하여 사찰을 방문할 때는 마음과 몸가짐을 경건히 하고 오로지 기도정진하는 마음 하나만 지녀야 할 것인데, 세속적인 마음과 셈법으로 부처님과 흥정하는 장사치 같은 이들도 허다하니 그 과보(果報)를 다 어찌할까 싶다.
여기 1940년대 유명한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언 리 주연의 영화 <애수>를 떠올리게 하는 삼 십대 남녀의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유난히 단풍이 곱게 물들던 어느 가을, 트렌치 코트를 커플룩처럼 맞춰 입고 자비정사 일주문을 들어서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영화 <애수>의 주인공이 살아 들어오나 착각을 불러올 만큼 선남선녀였다.
둘은 잠시 가을 산사 정취에 빠져들어 사진도 찍고, 정담을 나누더니 내가 있는 법당 안에 들어와 삼배를 올리고 다소곳하게 앉았다.
그제서야 나는 두 사람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남성은 키가 크고 훤칠한 외모에 언변이 좋았고, 여성은 백옥같은 피부에 까만 생머리 큰 눈을 가진 전형적인 한국 미인이었다.
그런데 코트를 벗자 임신 8개월은 되어 보였고,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남성도 일어서는 모습이 편안하지 않았다. 차분히 말문을 여는 남성 K씨와 여성 L씨의 사연은 기구했다.
소위 ‘스카이’라고 일컫는 명문대에 입학한 K씨는 법조인의 꿈을 키우며 성실히 생활했고,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과 첫눈에 반해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둘은 강의도 함께 듣고,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고, 벤치에 앉아 미래를 이야기하며 핑크빛 젊은 날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K씨가 사법고시 2차 시험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날 자가용으로 여자친구를 집에 바래다주던 K씨의 차가 빗길에 미끌어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다.
그 사고로 K씨는 한 달 이상 의식이 없었다. 깨어난 K씨는 여자친구의 안부를 가족들에게 물었지만 어느 한 사람 대답해주지 않았다. 퇴원 후 재활치료를 꾸준히 한 K씨는 혼자 걷기 시작한 그날 여자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집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이사해 살고 있었고, 수소문을 해도 여자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가고, K씨는 졸업을 했다. 사법고시는 보지 않았고, 대기업에 취직하여 가족들과 외식을 하러 호텔 레스토랑에 간 K씨. 그 앞에 서 있는 L씨는 귀여운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낯선 남자와 함께였다. 서로 당황하여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K씨는 차마 L씨에게 말을 걸 수도 인사를 할 수도 없어 가족들과 그 식당을 나왔다고 한다.
서운함에 화가 나고, 몸서리치는 배신감마저 들어 다시 그 호텔의 식당으로 달려간 K씨는 그제서야 L씨를 바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옆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는 L씨는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절룩절룩 힘겨운 한 발을 내딛는 그녀를 보자 눈물이 흘렀다. 사내아이가 “아빠, 엄마 집에 가요!”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듣고 L씨가 결혼한 것을 실감했다.
허탈함에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온 K씨에게 부모님은 하소연을 시작했다.
부모님은 “K야!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린 널 살려야 했고. 그 아이(L씨)는 너와는 인연이 아니야. 아주 오래 전 네 엄마가 널 임신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치기어린 젊은 혈기로 세상 무서울 게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내 잘못된 판단으로 한 가정이 파탄에 이르고, 나 역시 구속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 때 지나가던 탁발승 한 분이 지금 저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달라며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 아이가 바로 너였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 스님은 네가 스물 다섯이 되기 전에 널 강원도에 있는 절에 보내라고 했고, 다급한 우리 부부는 그러겠다고 철썩같이 약속을 했지. 그런데 그 일 때문인 것인지 나는 법정구속도 면하고, 승승장구 직장에서도 고속승진을 하고, 너는 또 무사히 잘 자라 원하는 대학에도 합격하고, 사법고시도 잘 준비하니 더는 바랄 게 없더구나. 그렇게 너의 스물 다섯 해 생일이 지나고 얼마되지 않아 너의 교통사고가 있고서야 우리 부부는 그 탁발승과의 약속을 떠올렸다”라고 설명했다.
부모님의 사연을 듣던 K씨는 어안이 벙벙하여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라며 더 화를 냈다. 이어지는 K씨 아버지의 말은 이러했다.
“그제서야 강원도 첩첩산중의 그 절을 찾아간 우리 부부는 백발이 성성한 탁발승을 만날 수 있었다. 부처님께 바치기로 한 명(命)을 어찌 부모가 움켜쥐고 살 수 있냐는 이야기에 어떻게 하면 너를 살릴 수 있냐고 물었다. 너가 살려면 우선 그 아이(L씨)와 헤어지라고 하더구나. 너는 스님의 팔자로 태어나 인물이 좋고, 명석한 거라고. 그런데 억지로 팔자를 거스르니 이런 사달이 난 거라고. 우린 서둘러 그 아이(L씨)의 부모에게 이런 이야길 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먼 곳으로 이사를 보냈다.”
자초지정을 들은 K씨는 “말도 안 된다”고 소리 소릴 지르고, 자신을 그런 이유로 떠난 L씨를 원망했다. 그날 밤 L씨를 찾아간 K씨는 더 놀랐다.
“오빠, 난 오빠랑 살면 죽는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사고를 당하고 다리도 다친 거야. 그리고 저 아이가 태어나고 알게 됐어. 오빠랑 나는 악연이라는 걸. 저 아이는 밤마다 경을 외워. 시끄럽다고 해도 태어나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오빠를 닮았는데 내가 오빠를 사랑해서 아이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었는데. 나도 그 탁발승 스님을 찾아갔었어. 이 아이를 안고. 스님이 그러더라. 니 남편이 부처님 제자가 될 운명인데 이렇게 떡하니 자손까지 태어났으니 부처님하고 한 약속은 누구라도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 내가 오빠랑 살면 이 아이도 죽는다고 하잖아. 혼자 얠 어찌 키우나 하는데 내 곁을 지켜준 건 지금의 남편이야. 오빠 나는 잊어.”
K씨는 그럼에도 L씨와 자신의 아들을 포기할 수 없어서 직접 탁발승을 찾아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따지려고 강원도로 향했다. 탁발승은 더는 절에 찾아오지 말라고 K씨에게 말했다.
스님은 “어차피 부처님 법에 공짜는 없습니다. 쌓아 놓은 공덕을 콩알처럼 파먹고 그 알량한 공덕마저 다 쓰고나면 그 때서야 본인의 업을 알겠지요”라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K씨는 어차피 스님이 되기는 죽기보다 싫고, 여자친구와 아들도 곁에 둘 수 없으니 죽자하고 몸을 던졌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이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게 아니기에 살아 돌아온 K씨에게 부모는 그저 감사했다. 그러나 K씨도 다리 한 쪽을 심하게 다치고 말았다.
그렇게 K씨와 L씨는 남남으로 몇 해를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K씨 앞에 나타난 L씨와 사내아이. 세월이 지나도 두 사람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살고 있던 남편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K씨 곁으로 돌아온 L씨는 운명 따위는 더는 신경 쓰지 말고 함께 잘 살 것을 약속했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 둘째 아이가 생겼고, 첫째 사내아이의 밤마다 외우던 경문도 둘째를 임신하고 사라졌다고 했다.
K씨는 “그런데 종정스님, 제가 스님이 될 팔자라면 지금이라도 머리를 깎고 절에 있으면 제 아이들과 아내는 편안할까요. 아니면 새로 태어날 둘 째도 그 운명을 함께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걸까요. 제발 저희가 더는 힘든 일 겪지 않고 살게 만 그렇게 만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K씨의 소원은 간결했다. 태어날 아이까지 네 사람이 행복하게 평범하게 살게 되는 그거 하나였다. 나는 사연을 다 듣고 복중 태아가 환한 빛을 머금고 L씨에게 온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자고로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를 비방한 죄는 형용할 수 없이 크다 하였다. 그런데 함부로 승려에게 부처님 전에 자식을 바쳐 자신의 일신상 안락과 복을 기원하는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아니한 죄가 큰데, 그 업보를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고 두 번째로는 승려를 비방하고 추긍하는 과오를 저질렀던 죄는 실로 무겁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 법은 지금 바로 복을 받지 않는다 하여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만 살고 끝나는 인생사가 아니지 않는가. 끊임 없이 윤회하듯 자손이 내 자리를 이어가는 게 속세인 것을 내가 기도정진하여 쌓은 선근공덕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그 자손이 번창하고, 복을 받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반대로 지금 당장은 잘 먹고, 잘 산다고 여길지 모르나 불. 법. 승 삼보를 비방하고 부처님과의 크나큰 약속을 저버리는 죄는 언제고 받게 되는 것이다. 그 화가 자손에게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히 부모의 도리이다.
내 눈에 비친 두 남녀의 지고지순한 애틋한 사랑은 인간의 법으로도, 부처님 법으로도 무죄이거늘 함부로 스님과 부처님께 약속을 한 부모는 여전히 깨닫지 못함이 안타까워 나는 K씨의 부모를 불렀다. 자식의 간곡한 청에 한달음에 온 K씨의 부모는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할 터이니 아이들을 살려 달라고 또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겁도 없이 내뱉었다.
나는 단호하게 K씨의 부모를 다그쳤다. 두 사람의 업보를 자손에게 떠밀지 말고 진실된 마음으로 청정한 도량에서 천일기도를 하며 참회하라고 했다. 그리고 K씨와 L씨 그들의 태어날 아이를 포함한 두 자녀를 위한 축원을 매일 하고, K씨 부친의 실수로 풍비박산 났다던 집안의 영가를 위한 위령제, 천도재도 함께 거행했다. 그렇게 두터운 K씨 집안의 업장(業障)소멸을 위한 기나긴 기도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K씨 부부는 슬하에 아들 2, 딸 1명을 두고 그토록 원하던 편안하고,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신뢰와 신위가 바닥에 떨어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실언과 망언 그리고 지킬 수 없는 거짓 약속을 하며 구업(口業)을 짓고 있다. 이는 지극한 기도로 반드시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하시는 대자대비한 부처님께서도 용서할 수 없으시지 않을까 싶다. 오늘 내가 내뱉은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지 한 번 돌아볼 일이다.
■북한산 한국불교 법성종 자비정사 종정 묘심. 필명 : 묘심화. 본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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