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엔뉴스 = 이동훈 기자] 자동차 애호가라면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British Racing Green)’이라는 색상에 한 번쯤 눈길을 준 적이 있을 것이다. 이 깊은 녹색은 단순한 컬러를 넘어, 한 시대의 스피드와 혁신, 그리고 영국 모터스포츠의 자긍심을 상징한다.
로터스, 애스턴 마틴, 재규어, 벤틀리, 미니, 모건, 맥라렌 등 무수히 많은 영국차들이 그들만의 ‘그린’에 충성을 바치며 질주해 왔다.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은 ‘그린 그 이상’이다. 이 ‘그린’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영국인들의 미적 감각, 그리고 성능과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의 모터스포츠 정신을 품고 있다.
이 전설적인 컬러의 기원은 1900년대 초반 유럽 대륙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3년 영국은 당시 자치령이었던 아일랜드에서 고든 베넷 컵(Gordon Bennett Cup)을 개최했다. 이때 영국은 자국 내 공공 도로에서 자동차 경주를 금지하고 있었다.
고든 베넷 컵에 출전한 각국의 경주차들은 각국의 고유 컬러로 칠해야 했다. 이를테면 프랑스는 파랑, 이탈리아는 빨강, 독일은 흰색, 벨기에는 노랑 등이었다. 영국은 아일랜드에 헌정하는 의미로 그린을 선택했다. 아일랜드는 연중 비가 자주 내리고 온화한 기후 덕에 푸르고 비옥한 초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에메랄드 섬(Emerald Isle)’이라고도 불렸다.
당시에는 경주의 리버리가 된 그린을 ‘샴록 그린(Shamrock Green)’이라고 불렀다. 이 ‘그린’은 훗날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으로 불리게 됐다. 이후 영국 경주차의 상징이 되어 F1, 르망 등 수많은 무대에서 전설로 남았다.
로터스는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포뮬러 원(F1)을 비롯한 모터스포츠에 참여하며 경량화 철학과 혁신적인 엔지니어링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 중에서도 1962년 로터스 25는 모노코크 섀시라는 새로운 구조를 최초로 도입해 차의 경량화와 안정성을 동시에 이뤄냈다. 짙은 녹색 차체 위로 흰색 스트라이프가 그려진 로터스 25는, 짐 클라크(Jim Clark)의 손끝에서 전설이 되었다. 클라크는 로터스와 함께 1963, 1965년 월드 챔피언에 오르며,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의 신화를 완성했다.
한편, 지난 2010년 로터스 레이싱팀은 15년 만에 포뮬러 원에 복귀하기도 했는데, 이때 역시 머신(T127)에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에 노랑 스트라이프를 입혀 ‘로터스의 귀환’을 강렬하게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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